1950년 일리노이주 시카고 출생으로 태어나자 마자 가족을 따라 LA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아버지를 둔 랜디스는 고교를 중퇴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갔다. 유럽에 도착한 후 그는 영화계로 투신하여 이태리와 스페인에서 제작된 스파게티 웨스턴에 엑스트라와 스턴트맨으로 활동했다.
한때 20세기 폭스사의 메일보이로 일한 바 있는 랜디스는 미국으로 돌아온 후, 1973년 자신이 연출하고 주연으로 출연한 저예산 SF 코믹 호러 [Schlock]로 데뷔하였다. 데뷔작 [Schlock]로 이태리 로마에서 열린 환타 페스티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랜디스는 주커형제와 짐 에이브라함스로 구성된 ZAZ사단이 각본을 쓴 [켄터키 후라이드 무비(77)]와 해롤드 래미스 각본의 [애니멀 하우스(78)]등 2편의 코미디 영화로 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1980년 코미디 [브루스 브라더스]를 크게 히트시키며 명성을 얻었다.
연이은 히트작 발표로 헐리우드내의 입지가 강화된 랜디스는 자신이 1969년부터 기획해온 환타지 호러[런던의 늑대인간 An American Werewolf in London(81)]를 발표했으며 1983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옴니버스 환타지 [트와이라잇 존]의 첫번째 에피소드를 맡게되었다. 하지만 영화촬영 막바지에 일어난 끔찍한 헬기 사고로 왕녀의 스타 빅 모로우와 두명의 아역배우가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고 랜디스는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를 당하게 되었다.
법원으로 부터 무혐의 판결을 받은 랜디스는 다시 연출활동을 재개했고 같은 해 촬영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뮤직 비디오 [스릴러]를 완성했다. 뮤직 비디오 사상 유례없는 히트를 기록한 [스릴러]의 놀라운 성공에 힘입어 랜디스의 유명세는 더욱 높아졌고 85년 돈 시겔에서 에이미 핵커링, 조나단 드미, 로랜스 캐스단 그리고 로제 바딤에 이르기까지 선 후배 혹은 동료 감독들이 까메오로 기꺼이 출연에 응한 독특한 코미디 [밤의 미녀 Into the Night]와 [스파이 라이크 어스(85)] [쓰리 아미고 (86)] [에디 머피의 구혼 작전 Comming to America(88)] [오스카 (91)]등의 코미디 영화를 내놓았다.
1994년 마틴 브레스트와 토니 스콧의 뒤를 이어 파라마운트사의 대형 폴리스 액션무비인 [비벌리 힐스 캅]의 3번째 작품의 연출을 맡게된 그는 마틴 브레스트와 토니 스콧이 보여준 스타일과 달리 자신의 장기인 코미디적 요소를 더욱 비중있게 버무린 작품으로 변질시켰으나 관객들의 외면을 받아야만 했다.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친 [비벌리힐스 캅 3] 이후, 심기일전한 랜디스는 코미디언 톰 아놀드 주연의 [스투피드]와 자신의 80년대 대표작인 브루스 브라더스의 후속편 [Blues Brothers 2000]을 완성했으나 흥행성적은 그의 전성기에 훨씬 못미치고 말았다.
한때 코카 콜라, 펩시, 디즈니, 켈로그등의 TV CF의 연출을 담당했던 존 랜디스는 Yale, Harvard, NYU, UCLA, UCSB, USC를 비롯한 미국내 유명 영화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후배 양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