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이태리 파르마 출생으로 이태리의 유명한 시인이자 작가인 아틸리오 베르톨루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작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15세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그는 로마 대학으로 지낙하여 현대문학을 전공했으며 10대시절 이미 이태리의 유명한 문학상인 Premio Viareggio상을 비롯한 여러 개의 트로피를 수상했다. 하지만 작가로서 아버지의 명성을 극복하지 못할것이라는 자괴감에 빠진 베르톨루치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이태리의 거장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1961년작[아카토네]의 조감독으로 고용되며 영화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1962년 미스테리 극 [죽음의 신 La commare secca]으로 데뷔한 베르톨루치는 1964년 [혁명전야 Prima della rivoluzione]을 발표하고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70년 자신의 초기 대표작이자 걸작으로 뽑히는 [거미의 계략 Strategia del ragno]을 발표했으며 1971년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으로 전세계에 외설시비를 일으킨 문제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Ultimo tango a Parigi]를 발표했다. 전세계 영화계에 논란의 화두를 던져준 이 작품은 흥행에 있어서는 놀랄만한 성적을 거둬 들였으며 1976년 대하 서사극 [1900 Novecento]을 만들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줬다.
80년대 들어 잠시 주춤한 베르톨루치는 1987년 다국적 자본이 출자된 대작 [마지막 황제]를 연출하며 다시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이듬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9개부문을 석권하며 전세계적인 흥행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베르톨루치를 일약 세계적인 거장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시작된 베르톨루치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관심은 데브라 윙거의 [마지막 사랑 The Sheltering Sky(90)]과 키아누 리브스의 [리틀 부다(93)]를 비롯한 그의 오리엔탈 3부작으로 이어졌으며 이후,베르톨치는 [스틸링 뷰티(96)] [하나의 선택 Besieged (98)][몽상가들(03)]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자신의 초기대표작인 [혁명전야]에 출연한 바 있는 이탈리아 밀라노 출생의 성우겸 배우인 아드리아나 애스티와의 결혼생활에 실패한 경험을 가진 그는 1990년 여류감독
클레어 페플로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