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헐리우드 여류연출가의 선구자적인 존재이자 작가였던 미모의 배우 아이다 루피노는 1918년 영국 런던에서 영국의 희극배우인 아버지 스탠리 루피노와 역시 배우였던 어머니 코니 에머럴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영향으로 런던의 RADA(Royal Academy of Dramatic Art)에서 연기수업을 받은 그녀는 1931년 아버지 스탠리 루피노의 사촌형이자 자신의 숙부인 루피노 레인의 연출작 [The Love Race]에 단역으로 출연하였으며 이듬해인 1932년 [Her First Affaire]라는 작품을 통해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33년 미국으로 건너가 헐리우드에 입성한 그녀는 파라마운트사에서 헐리우드 여배우로서의 첫 출발을 했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 라울 월시 감독의 40년대 초 작품 [They Drive by Night (40)]과 [하이 시에라 (41)]에서 명우 험프리 보가트의 상대역을 연기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1943년 빈센트 셔먼이 연출한 [하드 웨이]에서 펼친 호연에 힘입어 뉴욕 비평가협회 최우수 여배우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배우로서의 전성기를 열어준 40년대 내내 그녀는 주로 강인하고 터프한, 한마디로 하드-보일드 스타일로써 당시 여배우들이 꿈꾸던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 이미지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역할을 연기하며 "나는 가난한 자의 베티 데이비스다" 라고 농담섞인 말투로 자조하곤 했다.
1945년 남아공 출신의 영국배우인 첫 남편 루이스 헤이워드와 이혼한 후, 1948년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제작자인 콜리어 영과 결혼 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인디 프로덕션인 [더 필름 메이커즈]를 설립하고 연기가 아닌 연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49년 지병으로 도중하차한 엘머 클리프톤으로부터 메가폰을 넘겨받아 완성한 [Not Wanted]로 처음 카메라 뒤에서게 된 아이다는 1950년 정식으로 연출가의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네버 피어]로 장편 데뷔했으며 이후 [폭행 Outrage (51)] [챔피언의 어머니 Hard, Fast and Beautiful (52)]등 사회적 이슈를 다룬 일련의 여성 영화를 연출했다.
1953년 연출가로서의 최고작이자 여성이 영출한 최초의 필름 느와르로 꼽히는 [히치하이커]를 발표한 이후 아이다의 행보는 텔레비젼으로 옮겨졌으며 이후, [라이플 맨] [언터처블] [도망자]등 파워풀한 액션물을 연출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베티 데이비스에이어 이번에는 "가난한 자의 돈 시겔"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50년대를 지나 60년대를 거치면서 다수의 TV물을 연출함은 물론 [보난자] [형사 콜롬보]등의 인기 TV씨리즈와 몇편의 장편영화를 통해 연기활동을 병행키도 했던 그녀는 1970년대말 연기자로서 현역에서 은퇴하였고 1995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암으로 투병중에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