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이태리 로마 출생의 롯셀리니는 네오리얼리즘의 거장이자 프렌치 뉴웨이브인 누벨바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태리 감독으로 스웨덴이 낳은 세계적인 여우, 잉그릿드 버그만의 두번째 남편이며 여배우 이자벨라 롯세리니의 아버지이다.
이태리의 부르조아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로마에 최초로 영화관을 설립한 아버지덕에 어린시절부터 원하는대 로 영화를 보고 자랐으며 아버지의 사망후, 영화계에 뛰어들어 음향을 비롯한 다양한 파트의 스탶으로 활동했다.
1930년대 말부터 단편 영화와 다큐필름을 연출하기 시작했으며 1942년 이태리 해군의 지원으로 제작된 [하얀 배 Nave bianca, La]로 데뷔하였으며 이후, 전쟁 드라마 [공군 도아오다 Pilota Ritorna, Un (42)] [십자가의 사나이 Uomo dalla croce, L'(43)]를 차례로 발표하며 자신의 초기 파시스트 3부작을 완성하였다.
1945년 자신의 대표작이자 이태리 네오리얼리즘의 초기 걸작으로 꼽히는 [무방비 도시 Roma, città aperta]를 연출한 롯셀리는 [무방비 도시]와 더불어 자신의 네오리얼리즘 3부작으로 꼽히는 [전화의 저편 Paisà (46)]과 [독일 영년 Germania anno zero (48)]을 발표하였으며 1950년 자신의 영화에 반해 이혼을 하고 자신에게 온 잉그릿드 버그만과 결혼했다.
잉그릿드 버그만과 롯셀리니의 결혼은 당시 상당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자신의 전 남편을 버린 잉그릿드 버그만에겐 수많은 안티팬이 생겨났다.
잉그릿드 버그만 과의 결혼이후, 그녀를 캐스팅한 영화 [위대한 사랑 Europa '51 (52)] [이탈리아 여행 Viaggio in Italia (54)] [불안 Paura, La (54)] [잔다르크의 화형 Giovanna d'Arco al rogo (54)] 등을 연출하였으며 이중, [불안]은 잉그릿드 버그만과 함께 한 마지막 작품이었고 버그만과 결별한 롯셀리니는 유럽을 떠나 인도로 갔다.
인도에 머물면서 [인도]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발표한 그는 다시 이태리로 돌아와 영화작업을 계속하였으며 이때 만들어진 몇 편의 작품들은 그의 초기작과는 달리 상업성이 매우 짙은 작품들이었고 60년대 이후엔 TV 영화와 드라마 연출에 주력하였다.
프랑소와 뜨뤼포, 장 뤽 고다르의 영화적 스승이자 저 멀리 뉴욕 영화의 대부 마틴 스콜세지에게 까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며 현대영화의 아버지로 추앙받은 롯셀리니는 1977년 이태리 로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