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우베르 로샤, 루이 구에라 그리고 카를로스 디에구에스등과 더불어 브라질의 시네마 노보를 주도한 연출가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는 1928년 브라질의 상 파울로에서 출생하였다.
법대 출신인 그는 브라질에서 언론인으로 아마츄어 연극인으로 혹은 좌파 정치운동가로 활약했으며 프랑스로 유학하여 이덱에서 영화수업을 받기도 했다. 1950년대 초반 조연출가로 브라질 영화산업에 투신한 그는 1955년에 발표된 장편 [리오 40도 Rio 100 Degrees F.]로 데뷔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태리 네오 리얼리즘의 영향하에 완성된 그의 첫 장편 [리오 40도]는 세미 다큐필름의 형식을 빌어온 작품으로 브라질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당시 브라질의 수많은 영화학도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다.
60년대를 지나 70년대에 돌입하면서 점차 네오 리얼리즘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도스 산토스는 자신이 주도했던 브라질 시네마 노보의 쇠퇴기와 맞물린 1971년 브라질 의 식민 역사를 정치적 알레고리로 엮은 블랙 코미디 [귀여운 프랑스인 Como Era Gostoso o Meu Francês]을 발표하고 21회 베를린 영화제 그랑프리 후보에 오르며 국제 평단의 호평을 끌어냈다.
1974년 발표한 [오굼의 부적 O Amuleto de Ogum]을 비롯하여 77년작 [기적의 천막 Tenda dos Milagres]과 [인생의 고속도로 Na Estrada da Vida (80)]그리고 [쥬비아바 Jubiabá (85)]에 이르기까지 그가 70년대를 관통하여 80년대에 발표한 작품들은 브라질 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브라질의 가장 대중적인 영화들로 평가받았으며 이러한 작품을 통하여 그는 브라질을 대표하는 국민 감독으로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