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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르느와르 Jean Renoir

프랑스/Poetic Realism

by 켄2 2010. 7. 29.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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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추앙받는 장 르느와르는 1894년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뜨에서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오귀스뜨 르느와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9살위의 형 피에르 르느와르는 무성 영화시절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프랑스 영화계에서 배우로 활동했다)

유명 화가인 아버지를 둔 덕분에 여러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성장한 르느와르는 어린시절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았으나 대학에 진학해서는 수학과 철학을 전공하였다. 일차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공군으로 참전한 그는 전투중 다리에 부상을 입고 제대하였다.

1919년 아버지의 마지막 모델이었던 앙드레 애슐링(후에 까뜨린느 애슐링으로 개명)과 결혼 한 그는 이 당시 즐겨보았던 찰리 채플린과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의 영화에 매료되어 결국 아버지의 유산인 그림들을 처분하여 영화사를 설립 영화제작을 시작하였다.

1924년 자신의 아내 애슐링을 주인공으로 내새운 작품 [까뜨린느 Une vie sans joie]제작하고 알베르 듀도네와 공동으로 연출한 르느와르는 같은해 자신의 공식 연출데뷔작인 [물의 소녀 La fille de l'eau]를 연출하였으며 1926년에는 에밀 졸라 원작을 각색하고 아내 애슐링이 주연한 [나나]를 발표하였다.

르느와르 자신이 슈트로하임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나나]는 비록 당시의 흥행에서는 실패하였지만 오늘날 프랑스 무성영화중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나나]의 흥행 실패로 인해 자금 압박을 받은 그는 1927년 다분히 상업성을 겨냥한 흔적이 역력한 [마르퀴타]를 발표하였고 1929년 자신의 마지막 무성 영화인 [빈민촌 Le bled]을 발표한 이후 첫번째 아내인 애슐링과 결별하였다.

1931년 자신의 첫 사운드 필름인 [아기에게 하제를 복용시켰다 On purge bébé]를 연출한 그는 이 작품을 통하여 얻은 수익으로 자신의 최고작중 하나로 꼽히는 [암캐 La chienne]를 같은해에 완성하였으며 1932년 형인 피에르 르느와르가 출연한 범죄물 [교차로의 밤 La nuit du carrefour]을 발표하였다.

조르쥬 심농의 스릴러 소설을 각색하여 완성된 이 작품은 편집기사의 실수로 상당량의 필름이 유실되어 다소 이해키 어려운 플롯으로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프랑스 미스테리 스릴러 무비의 교과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939년, 이후의 수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세계영화사에 빼놓을 수 없는 걸작 리스트에 빈번히 오르게 되는 자신의 마스터피스 [게임의 법칙 La règle du jeu]을 연출하였는데 훗날 르느와르는 자신이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 싶었던것은 모든 게임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으며 그것을 깨뜨리는 자는 게임에서 지는것이다 였다고 훗날 술회하였다.

1940년 미국 연출가 로버트 플래허티의 초청을 받은 르느와르는 41년 미국으로 건너가 20세기 폭스사에서 첫 헐리우드 작품[수렁 Swamp Water]과  찰스 로튼, 모린 오하라 주연의 반 나치 영화 [이땅은 우리의 것 This Land Is Mine (43)]을 연출하였으나 두 편다 흥행과 비평면에서 시원찮은 반응을 얻었다.

이렇듯 미국에 도착한 후 한동안의 슬럼프에 빠졌던 르느와르는 1944년 자신의 스크립터였던 디노 프레베와 두번째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시민권도 취득하였다

1947년 로맨스와 느와르의 장르적 특징이 혼재한 작품 [해변의 여인 The Woman on the Beach]을 끝으로 미국 생활을 청산한 르느와르는 45년작 [남부인]만이 미국에서 만든 그의 작품 중 유일한 수작이라는 씁쓸한 평가를 뒤로한채 미국을 떠났다.

미국을 떠난 후, 잠시동안의 공백기를 가진뒤 1951년 인도에서 프랑스와 미국의 자본으로 완성한 [강 The River]를 연출하였는데 이 작품은 자신의 조카이자 형 피에르의 아들인 끌로드 르느와르가 촬영한 작품으로 르느와르의 첫번째 컬러영화였다.

이어 [황금 마차 Le carrosse d'or (52)] [프렌치 캉캉 (54)]과 잉그릿드 버그만이 주연한 [엘레나와 남자들 Elena et les hommes (56)]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을 성공시킨 그는 1959년 아버지 오귀스뜨 르느와르에게 경의를 표한 작품 [풀밭에서의 오찬 Le déjeuner sur l'herbe]을 연출하였으며 1970년 연출작인 [장 르느와르의 조그만 극장]을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고 197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비벌리힐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당대의 시적 리얼리즘은 물론 이후의 프랑스영화 그리고 이태리의 네오 리얼리즘에 이르기까지 영화사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과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불후의 명감독에게 영국 왕립 예술학교는 명예박사학위(71)를 미국 아카데미상 위원회는 특별상(75)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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