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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와일러 William Wyler

클래식

by 켄2 2008. 11. 3.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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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독일 알사스 뮬하우젠(현 프랑스) 출생의 윌리엄 와일러는 스위스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Wilhelm Weiller 이다.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창립자인 칼 라에믈의 사촌뻘 되는 그의 어머니는 어린 와일러의 장래를 부탁했으며 와일러는 192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뉴욕사무실에서 주급 25달러를 받으며 메일보이로 일하던 그는 1923년 L.A.로 이주한 후,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무대 청소와 셋트 이동등 허드렛일 부터 시작하였고 보조 편집자를 거쳐 연출부 스탶이 되었으며 1925년 단편 웨스턴 [The Crook Buster]를 연출함으로써 유니버셜 스튜디오내 최연소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최연소 연출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어빙 탈버그는 한때 그를 가르켜 "쓸모없는 윌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928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그는 [A House Divided (31)] [Tom Brown of Culver (32)]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유니버셜 스튜디오 내의 실력파 감독으로 부상했다. 무자비할 정도로 자신이 원하는 장면이 나올때 까지 한 테이크를 여러번에 걸쳐 재촬영하는 그의 고집은 이때부터 악명이 자자해졌으나 그 결과는 종종 영화제의 수상이나 평론가들의 호평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 중반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떠난 와일러는 당시 인디 제작자였던 MGM의 사무엘 골드윈과 영화작업을 시작했으며 1936년작 [These Three]을 첫 작품으로 하여 베티 베이비스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지저벨 Jezebel (38)] 에밀리 브론테 원작의 [폭풍의 언덕 (39)] 필름 느와르 [편지 (40)] 와일러의 첫번째 오스카 감독상 수상작 [미니버 부인 (42)]그리고 감독상과 작품상을 비롯하여 아카데미 7개부문을 석권한 [우리생애 최고의 해 The Best Years of Our Lives(46)]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명작품을 발표했다.

1953년 영화사에 길이남을 로맨스 무비의 마스터피스로 꼽히는 오드리 햅번 주연의 [로마의 휴일]을 연출했으며1956년작 게리 쿠퍼 주연의 [우정어린 설복 Friendly Persuasion]으로 깐느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와일러는1959년 아카데미 최다부문 수상이라는 기록을 수립한 불멸의 걸작 [벤허]를 완성하고 " 오! 신이시여 정녕 제가 이 작품을 만들었단 말입니까? " 라는 너무나도 유명한 멘트를 남겼다.

오드리 햅번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백만달러의 사랑 How to Steal a Million (66)]과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주연의 뮤지컬 [화니 걸 Funny Girl (68)]등의 후기 작품을 발표했으며 1981년 L.A. 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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