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출생의 머빈 르로이는 유복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부유했던 그의 집안은 1906년 샌프란시스코 전역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인해 모든것을 잃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조부 소유의 백화점은 지진으로 인해 완전 붕괴되었으며 거액의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으나 보험사 마저 지진으로 인해 파산하는 바람에 그의 가족은 한푼도 보상받을 수 없었다.
어린시절 돈을 벌기 위해 신문팔이를 시작한 르로이는 이후,쇼극단에 가수로 입단하여 각종 버라이어티쇼에 출연하게되었으며 몸담고 있던 극단이 해체되자 사촌인 제씨 라스키(후에 아돌프 주커와 공동으로 파라마운트 픽처스를 설립)와 함께 헐리우드로 진출했다.
헐리우드 진출이후 의상담당 스탶으로 출발한 그는 보조 카메라맨을 거쳐 무성영화의 개그 라이터와 배우로 활동했으며 첫번째 아내인 여배우 에드나 머피와 결혼하던 1927년 로맨틱 코미디 [갈곳이 없다 No Place to Go]로 장편 데뷔했다.
데뷔 이후 연속적으로 발표한 그의 20년대 후반 작품들은 저 비용으로 높은 흥행수익을 올리는 영화로 정평이 나기 시작했으며 제작사인 First National Pictures(후에 워너 브라더스에 합병)에게 막대한 흥행 수익을 안겨주었고 머빈 르로이는 당대 헐리우드의 원더보이로 이름을 날렸다.
1931년 유성영화 시대의 첫번째 갱스터 필름으로 꼽히는 [리틀 시저]로 많은 인기를 모은 르로이는 1933년작 [황금광들 Gold Diggers of 1933]들을 비롯한 수많은 히트작을 양산하며 워너 브라더스의 대표적인 연출가로 부상했다.
1930년대 말 워너를 떠나 MGM으로 옮긴 후, 빅터 플레밍 감독의 [오즈의 마법사 (39)]의 제작을 담당함과 동시에 킹 비더 감독등과 연출작업에 참여했으며 1940년 전세계 멜로 영화팬들의 심금을 울린 자신의 대표작 [애수 Waterloo Bridge]를 발표했고 크라크 게이블을 비롯한 라나 터너, 로버트 밋첨, 로레타 영과 같은 대스타들을 발굴해냈다.
1951년 오늘날까지 스펙타클 성서영화의 마스터피스로 꼽히는 [쿼바디스]를 연출한 르로이는 다시한번 MGM에게 막대한 흥행 수익을 안겨 주었으며 빅터 마츄어 주연의 뮤지컬 [백만달러 인어 Million Dollar Mermaid (52)] 라나 터너 주연의 코미디 [Latin Lovers (53)] 헨리폰다 주연의 코믹 전쟁 드라마 [미스터 로버츠 (55)] 등의 50년대 작품을 발표했다.
1968년 미국영화사상 최초의 월남전 영화로 꼽히는 존 웨인 주연의 [그린베레]를 존 웨인과 공동으로 연출한 것으로 알려진 르로이는 전 미합중국 대통령을 지낸 배우 출신의 정치가 로널드 레이건에게 훗날 그의 아내가 된 여배우 낸시 데이비스를 소개시켜준 유명한 일화를 남겼으며 1976년 아카데미 평생 공로상인 어빙 탈버그 상을 수상하였고 1987년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비벌리힐즈의 자택에서 지병인 알츠하이머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