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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론 브란도 Marlon Brando

배우출신/헐리우드 스타

by 켄2 2009. 4. 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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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헐리우드가 낳은 전설이자 누구도 범접할수 없는 카리스마의 소유자 마론 브란도는 1924년 미국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에서 아버지 Marlon Brando Sr.와 배우출신 어머니 Dorothy Pennebaker "Dodie" Brando의 3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Bud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던 브란도는 11세에 부모를 따라 일리노이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으며  부모의 이혼 후, 진보적이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어머니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다분했던 반항기로 인해 무척이나 떠들썩 했던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19세에 Shattuck-Saint Mary's 사관학교를 중퇴하고 연극 배우로 성장한 누나 조슬린 브란도를 따라 자신도 연극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일리노이주를 떠나 뉴욕으로 이주한 브란도는 자신의 멘토인 전설의 명여우 스텔라 아들러를 알게되었고 그녀의 소개로 러시아계 뉴욕 연극무대의 거물 연출가 Konstantin Stanislavski 를 만나게 되었으며 메쏘드 액팅의 산실인 액터즈 스튜디오에서 연기수업을 받았다.
 
1950년 스탠리 크레이머가 제작하고 프레드 진네만이 연출한 [The Men]으로 영화계에 데뷔하였으며 이듬해인 1951년 연출가 엘리아 카잔과의 유명한 일화를 남기며 캐스팅된, 테네시 윌리암스의 유명 희곡을 각색한[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의 스탠리 코왈스키 역으로 생애 첫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으나 그해 오스카 남우주연상의 수상자는 [아프리카의 여왕]에서 열연한 험프리 보가트에게 돌아갔다.

불과 두개의 작품만으로 저널은 물론 당대의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강한 인상을 남겨준 브란도는 이후, 엘리아 카잔의 [혁명아 자파타 Viva Zapata! (52)] [워터프론트 On the Waterfront (54)]그리고 조셉 L.맨키비츠의 [줄리어스 시저 Julius Caesar (53)]등의 작품을 통하여 4년 연속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쾌거를 이뤄냈으며 이 중 특유의 반항아적 기질을 보여준 [워터프론트]의 Terry Malloy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브란도 신화의 서막을 열었다.

1954년 나폴레옹 황제 역을 연기한 [데지레]에서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호연을 보여줬던 브란도는 1957년 조슈아 로건의 연출작 [사요나라]로 생애 5번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1961년, 협상단계에서 결렬되어 물러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을 대신하여 연출을 맡게된, 자신의 유일한 연출작인 웨스턴 [애꾸는 잭 One-Eyed Jacks]를 완성했다.

이후, [바운티 호의 반란 Mutiny on the Bounty (62)] [어글리 아메리칸 The Ugly American (63)] [체이스The Chase (66)] 그리고 무성영화 시대의 전설 찰리 채플린의 연출작 [상해에서 온 백작 A Countess from Hong Kong (67)]등의 60년대 작품에 출연한 브란도는 1972년 자신의 영화인생에 정점을 찍은 위대한 걸작이자 생애 최고의 위대한 연기를 보여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The Godfather]에 출연하여 자신의 6번째 남우주연상 노미네이트를 기록하며 수상자가 되었으나 아메리칸 인디언의 인권문제와 그들에 관한 저널 매체의 왜곡된 묘사를 문제삼아 인디언 출신의 여배우 Sacheen Littlefeather를 대리 수상자로 내세우는 것으로 사실상 오스카 수상을 거부했다.

비록 시상식을 보이콧트 했으나 [대부]에서 보여준 마피아 보스 돈 꼴레오네의 연기로 20세기 최고 명우의 반열에 오른 브란도는 대부와 같은 해 완성된 이태리의 거장 베르나르도 베루톨루치 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Ultimo tango a Parigi/Last Tango in Paris]로 7번째 오스카상 후보자가 되었으며 이 작품을 통하여 보여준 프랑스 출신의 상대 여배우 마리아 슈나이더와의 파격적인 정사씬은 오랫동안 전세계 영화계에 논란을 몰고왔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이후, 4년간의 공백 후에 아서 펜 감독의 웨스턴 [미주리 브레이크 The Missouri Breaks]로 컴백하였으며 1978년 리차드 도너의 초대형 블럭버스터 [슈퍼맨]에 슈퍼맨의 아버지이자 크립톤 행성의 과학자인 조엘 역을 연기하고 단 12일간의 촬영에 370만불 플러스 런닝 개런티라는 천문학적 거금을 받음으로써 헐리우드의 전설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1979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다시 뭉친 브란도는 깐느영화제 황금 종려상 수상작이자 수많은 논란을 야기한 베트남전 영화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에 커츠 대령역으로 다시한번 신의 경지에 오른 연기력을 발휘하였으며 1989년 65세의 고령의 나이에 출연한 유잔 팔시 감독의 [백색의 계절 A Dry White Season]으로 생애 마지막이자 8번째의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크리스토퍼 컬럼버스 (92)] [돈 쥬앙 Don Juan DeMarco (94)] [닥터 모로의 DNA The Island of Dr. Moreau (96)] [브레이브 (97)]등 노년에 그가 출연한 후기작품에서 출연비중의 경중을 떠나 거부할 수 없는 존재감을 나타낸 전설의 명우 브란도는 프랭크 오즈의 2001년작 [스코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으며 세번의 결혼을 통해서 얻은 5명의 자녀와 두명의 입양아 그리고 오랜세월 노년을 함께 해준 Maria Christina Ruiz와의 사이에서 낳은 3명의 자녀등 모두 10명의 자녀를 남기고 2004년 7월 1일 로스앤젤레스의 UCLA의료 센타에서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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