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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자와 아끼라(黒澤 明) Kurosawa Akira

일본

by 켄2 2008. 12. 16.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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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영화의 천황이자,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미조구치 겐지(溝口 健二) 나루세 미키오(成瀨巳 喜男)등과 더불어 일본은 물론 전세계 영화계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영화계의 거인 구로자와 아끼라는 1910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사무라이의 후손인 아끼라의 아버지는 군인출신의 체육, 교련 선생님으로 아끼라는 그의 4남 4녀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1928년 경화중학교를 졸업한 후, 화가의 뜻을 품고 일본 프로레타리아 화가동맹에 참가하여 미술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얼마 안있어 화가의 길을 포기한 아끼라는 1936년P.C.L.영화제작소(現 도호영화사)에 말단 스탶으로 입사하여 연출부 써드 디렉터로 현장경험을 쌓기 시작했으며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여러작품에서 조연출을 지낸후에 1943년 메이지 유신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도인의 수련과정을 다룬 드라마 [스카타 산시로 姿三四郞]로 장편 데뷔했다.

이후, 아끼라는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로 하여 [가장 아름답게 一番美しく(43)] [호랑이 꼬리를 밟은 남자들 虎の尾を踏む男達 (45)] [나의 청춘에 후회는 없다 わが靑春に悔なし (46)] [멋진 일요일 素晴らしき日曜日(47)] [주정뱅이 천사醉いどれ天使 (48)] [조용한 결투 靜かなる決鬪 (49)] [들개 野良犬 (49)] 등의 사회성 짙은 휴먼드라마를 발표하고 도호영화사의 대표적인 연출가로 성장하였으나 45년 연출작인 [속, 스카타 산시로 續, 姿三四浪 ]의 쓰라린 실패로 구로자와는 이후로는 두번 다시 속편을 연출하지 않았다.

1950년 다이에이(大英) 영화사로 잠시 이적하여 아시아 영화로는 최초로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자신의 대표작 [라쇼몽 羅生門 ]을 연출하고 전성기를 열었으며 영화 [라쇼몽]은 1964년 마틴 리트 감독에 의해 [폭행 The Outrage]이란 제목의 헐리우드 웨스턴으로 리메이크 되었다.

1951년 도스토에프스키의 원작을 영화화한 [백치 白痴]를 연출하였으며 1952년 죽음에 직면해서야 진정한 삶을 깨달는 아이러니로 존재론적인 성찰을 다룬 휴먼 드라마 [이키루/산다 生きる]로 베를린 영화제 특별상을 수상한 아끼라는 1954년 일본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으로 꼽힘과 동시에 존 스터지스 감독의 불멸의 웨스턴 [황야의 7인 The Magnificent Seven (60)]의 원형이 된 [7인의 사무라이 七人の侍]를 연출하고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하며 다시 한번 일본 영화를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평소, 존 포드의 고전적 연출 스타일과 카부키의 연기양식을 접합함으로써 서구와 일본문화의 접목을 꾀해온 아끼라의 작품세계는 1957년 세익스피어의 [맥베드]를 일본 전국시대로 옮겨와 바람과 안개의 미장센과 미조구치 겐지의 [산소 다이유]에 바쳐지는 오마쥬의 오프닝과 앤딩으로 장식한 [거미집의 성 蜘蛛城]에서 절정을 이루었으며 아끼라는 이어 1958년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에 모티브를 제공한 오락시대활극 [숨은 요새의 새악인 隱し砦の三惡人]을 발표했다.

1959년 자신의 영화사 구로자와 프로덕션을 설립한 아끼라는 좀 더 자유로워진 환경속에서 자신의 프로덕션 1호 작품이자, 일본사회의 정경유착을 [햄릿]의 구도를 빌어 신랄하게 비판한 [악인이 더 편히 잔다 惡い奴ほどよく眠る]를 발표한 후, 이듬해 스파게티 웨스턴의 거장 셀지오 레오네가 [황야의 무법자 Per Un Pugno Di Dollari]로 리메이크 한 사무라이 시대 활극 [요짐보 用心棒]를 완성하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으며 [요짐보]의 성공에 고무된 도호영화사는 아끼라에게 비슷한 스타일의 영화 한편을 더 연출해줄것을 요구했고 아끼라는 이에 따라 1962년 [요짐보]의 확장판이자 스펙타클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쓰바키 산주로 椿三十郞]을 연출했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와 월터 힐 감독의 [라스트 맨 스탠딩]의 원형이된 [요짐보]와 마찬가지로, 어떤 면에선 [요짐보]의 속편이라 볼수있는 [쓰바키 신주로] 또한 타국의 영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액션 영화의 거장 샘 페킨파와 오 우삼은 그 영향력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일본영화계 뿐만 아니라 전세계 영화계에 그 막강한 영향력을 전파한 아끼라의 전성기는 1965년 발표한 [붉은 수염 赤ひげ]이후, 급격한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는 20세기 폭스사의 전쟁 스펙타클 [도라 도라 도라]에서의 도중하차와 자신의 구상하고 연출을 희망했던 [폭주기관차]의 무산으로 생겨난 5년의 공백기가 그 주된 원인이었다.

존 포드의 전쟁영화를 의식한 아끼라는 영국의 거장 데이비드 린이 아메리칸 파트의 연출을 담당한다는 조건으로 영화 [도라 도라 도라]의 일본 파트를 연출할 것을 수락했으나 이는 20세기 폭스사 제작진의 기만이었음이 밝혀지자 아끼라는 촬영도중 의도적으로 해고를 유도했고 결국 [도라 도라 도라]의 메가폰은 후배 일본 감독 마쯔다 토시오와 후카사쿠 킨지의 몫으로 돌아갔다.

설상가상으로 1970년 발표한 자신의 첫 컬러영화 [도데스카덴 どですかでん]의 실패로 끝나자 의기소침해진 아끼라는 결국 죽음이라는 극단적 수단을 택했고 1971년 자살을 시도했으며 이는 일본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후, 또 한번의 공백기를 가진 아끼라는 이미 일본 영화계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었으며 점차 잊혀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자살로 인한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아끼라는 이후, 더욱 의욕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1975년 소련(현 러시아)정부의 초대를 받아 소수 정예의 스탶을 이끌고 시베리아 로케로 완성한 [데루스 우잘라 デルス・ウザーラ]로 모스크바 영화제 금상과 아카데미 영화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7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스튜디오는 대작영화의 제작을 기피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아끼라는 적극적으로 해외의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결국 조지 루카스와 프란시스 코폴라의 전폭적인 지지와 20세기 폭스사의 지원으로 1980년 자신의 후기 걸작 [가게무샤 影武者]를 발표하고 깐느 영화제 그랑프리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영화제를 석권하며 일본 영화계의 천황으로 칭송받기 시작했다.

영화 [가게무샤]의 비평적, 상업적 성공에 고무된 아끼라는 프랑스의 자본을 끌어들여 수년간의 준비기간을 걸친 후에 1985년 자신의 오랜 숙원이었던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일본의 전국 무장시대로 옮겨와 70 mm 스팩타클 화면위에 현란한 색채의 향연으로 펼쳐놓은 서사비극 [란 亂] 을 완성했으며 1990년 조지 루카스, 프란시스 코폴라가 지원하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에 가세한 [구로자와 아끼라의 꿈 夢]을 발표했다.

깉은해인 1990년 미국 아카데미협회로 부터 주어진 명예상을 수상하였으며1991년 헐리우드 스타 리차드 기어를 캐스틴하여 일본 원폭의 후유증을 다룬 드라마 [8월의 광시곡 八月の狂詩曲]을 연출하였다. 1993년 자신의 마지막 연출작인 된 [마다다요 まあだだよ]를 연출한 아끼라는 자신의 차기작인 [비 내리다 雨あがる]를 준비하던중 악화된 건강을 치료차 요양생활을 하다 1998년 9월 뇌졸증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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